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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자동차 모티브가 된 기아자동차 스토리 / 재벌집 막내아들

by 고구마냠냠냠 2022.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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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자동차 모티프가 된 기아 자동차 스토리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극 중에 아진 자동차가 등장합니다. 순양 그룹에서 아진 자동차를 인수하고 싶어 하고 끝내 순양 자동차가 아진 자동차를 인수하게 되는데요. 아진 자동차의 모티브가 된 기업이 바로 기아 자동차입니다. 기아 자동차는 한 때 국민 기업이라고 불렸던 대기업이었는데요. 재개 서열 10위 안에 들 만큼 규모가 컸고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또 재벌가 출신이 아닌 전문 경영인으로 회사를 이끌면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됐던 과거의 기아자동차 이야기 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아차가 현대차에 인수되기 전 얘기지요.

 

 

기아 자동차는 많은 히트 상품을 탄생시켰습니다. 대표적으로 봉고차가 있고 프라이드, 캐피탈, 콩코, 세피아, 카니발 등 여기에다가 크레도스, 포텐샤, 슈마, 스포츠카 엘란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렇게 눈부셨던 성장 후에 한 차례 추락을 했고 기아차는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던 시기인 IMF 외환위기를 일으키는 뇌관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는데요. 과거의 잘 나갔던 기아차가 왜 추락했을까요?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아자동차는 1944년 만들어진 경성전공로 부터 시작한 회사입니다. 김철호 창업자라는 분이 일제강점기에 살길이 막막하니까 일본으로 건너가서 힘들게 일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공장을 차려 성공하였습니다. 일제가 패망할 즈음에 고국에 돌아와 자전거를 만들어 보겠다고 차린 회사였지요. 당시에 우리나라는 독자 기술로 자동차 오토바이는 물론이고 자전거조차 못 만들 때였습니다. 자전거 역시 무척 귀한 이동수단이었습니다. 당시 시내에 자전거가 다 모아도 300대 정도밖에 없었다 기록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렵사리 자전거 부품도 만들고 완제품 출시를 앞둔 시기에 6.25 전쟁이 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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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 회장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고 회사 이름을 바꿔서 다시 자전거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우뚝 솟아서 세계로 간다.'라는 의미를 담은 기아 산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출시한 제품은 최초의 국산 자전거 삼천리 입니다. 삼천리 곳곳을 누비라는 의미를 가지고 출시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삼천리 자전거의 시초였습니다. 기아산업은 자전거에 이어서 오토바이 삼륜차 등을 생산하며 상당한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합니다.

 

기아라는 기업이 특이했던 것이 당시에 대부분 기업은 성장을 함에 따라 사업 분야를 넓혔습니다. 하지만 기아의 창업주 김철호는 분은 기계 공업 한우물만 팠습니다. 자전거, 오토바이, 삼륜차 그다음에는 자연스럽게 네 바퀴달린 자동차 산업으로 진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부에 자동차를 생산하고 싶다고 계속 어필을 했습니다. 정부에서 자동차를 산업을 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 조건은 외국에서 부품을 구매하여 조립만 하는 공장이 아니라 엔진, 미션, 프레스, 차체 도장, 조립까지 모든 공정을 갖춘 공장을 만든다면 인가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자동차 산업은 외국 부품을 조립하여 차량을 만드는 형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른 기업이라면 수지타산을 생각하여 고민을 해야 했겠지만, 김철호 창업주는 기계공업 한 우물을 팠기에 조건을 받아들여 공장을 세우기로 합니다. 그래서 국내 최초의 종합자동차 공장이라는 경기도 광명의 소아리 공장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이 소아리 공장 준공 즈음에 김철호 창업주는 완성차 판매를 바로 눈앞에 두고 눈을 감고 맙니다. 1973년 국내 자동차 산업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말입니다.

 

이후에 2세 경영 체제를 맞은 기아 산업은 1974년부터 일본 회사로부터 도입한 모델을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이륜차를 생산하면서 아시아 자동차도 인수합니다. 하지만 얼마 후 현대자동차가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를 생산합니다. 기아는 금세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지요. 하지만 70년대 경제가 급성장을 하고 자동차 수요도 늘 때였으니 기아차의 생산량도 계속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79년 2차 오일 쇼크와 이어진 경제 위기로 인해서 기아는 존폐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당시 기름값이 세 배 가까이 치솟고 물가가 급등하고 실업자도 많아지며 경제 성장도 꺽이게 됩니다.

 

 

1954년 이후에 최초로 경제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합니다. 이런 상황임에 따라 기아차는 물론이고 다른 차 업체들도 자동차 판매량이 떨어지게 됩니다. 1979년에서 80년까지 갈 때 불과 1년 사이에 기아차의 생산수량이 10% 넘게 급감합니다. 설상 가상으로 정부에서는 기아한테 기아 너희는 승용차나 뭐 오토바이 같은 거 팔생각 말고 소형 트럭 같은 중소형 상용차만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심지어 기아보다 작은 업체랑 대등하게 합병을 요구합니다. 이게 정부의화 화학 공업 합리화 대책의 일환이었죠.

 

그러는 사이에 기아은 1979년과 81년 2년에만 500억 원 넘는 적자로 쉽게 말해서 망하게 생기게 됩니다. 거기다가 또 회사가 불안하니까 이상한 소문까지 계속 돌게 됩니다. 창업 2세 회장이 치료 때문에 미국에 가 있었는데, 회장이 지분을 다 팔고 미국으로 이민 간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러니까 회사가 더 흔들리는 거죠. 근데 결과적으로 소문처럼 자기 살길만 찾은 게 아니라 회장은 절대 그럴 일이 없다면서 본인의 지분을 처분할 권리 의결권 모두 회사에다가 위임하고 경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후 정부의 조치로 기아차가 소형차를 만들수 없게되어 트럭들을 만들게 됩니다. 또한 소형 트럭 뒷자리를 사람이 탈 수 개량하여 소형 승합차로 출시한 상태했습니다. 그게 바로 봉고입니다. 당시 초반에는 소형 승합차 생소했지만, 1980년대 초반에 사람들이 좀 먹고 살만해지니까 여가를 즐기기 시작하고 야외 활동을 늘리는데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가용까지 끌 형편까지는 안 올라왔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같이 탈 차가 필요했는데 그렇다고 대형 버스를 탈 수도 없고 유치원, 교회 같은 단체도 많아지면서 봉고의 수요가 늘어갔습니다. 당시 기아 직원들이 사진 앨범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 많이 모이는곳에 어디든 찾아가 영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사람들의 니즈에 딱 맞았던 봉고가 기아차를 살리게 되었습니다. 불과 얼마 안 돼서 82년과 83년에만 봉고와 봉고 트럭이 무려 6만 7000대나 팔렸습니다. 그동안 생겼던 적자를 다 해소하는 정도였습니다. 이 봉고의 흥행으로 망한다던 기아차가 단숨에 흑자로 돌아서고 80년대 중반에는 큰 이익까지 냈습니다. 거기다가 정부가 회사마다 생산 차종을 제한한 조치가 87년에 풀리게되면서 여기에 맞춰서 기아가 승용차 판매를 재개합니다. 봉고와 함께 과거의 기아차를 상징했던 프라이드를 만들게 됩니다. 프라이드가 기아 최고히트 상품 중 하나입니다. 수백만 대를 수출하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기아가 프라이드를 출시한 배경에는 사실 아귀가 딱딱 맞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일단 기아로서는 우리가 곧 승용차를 다시 팔 거고. 한국 경제가 이대로로 성장을 하면 마이카 시대가 열릴 거니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엔트리카를 만들어야 이런 전략이 있었겠고요. 일본 회사로서는요 최대 시장 미국에서 오일쇼프 이후에 기름을 덜 먹는 일본 차가 워낙 엄청 잘 팔렸었거든요. 근데 이게 문제가 되니까. 미국이 일본 차 수입을 사실상 제한하는 조칙을 내렸어요. 자율 규제라곤 했는데 사실상 미국이 압박을 한 거지. 일본 차 판로가 막히긴 했는데 그래 한국업체랑 손을 잡고 우리 모델을 한국에서 생산해서 팔면 돼요. 이런 의지가 있었죠. 일본 업체로서는 자 그리고 미국 업체는 어땠느냐 자기들은 주로 큰 차를 만드는데 소형차 사려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값이 비싸니까 그런데 일본차는 예전처럼 못 들어오고 자 일본 소형차를 대체할 게 필요하잖아요. 이런 필요들이 맞아떨어집니다. 

기아는 뭐 봉고 프라이드의 대성공 그리고 뭐 콩코드 피탈 코텐샤 같은 세단 독자 생산 능력을 키우는 세피아의 선전까지 해서 회사의 지배구조도 바뀌고 성공도 지속될 것만 같았죠. 전문 경영인 김선홍 사장은 회장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굉장히 이례적인 일인게 기아는 전통의 재벌이 최대 주주도 아니고 재벌에 의해서 경영되지도 않는 심지어 주주한테 배당도 많이 하는 국민기업이라는 칭송을 받았죠 90년대 초반까지 얘기해요. 왕절게 힘밀입다 자 그런데 90년대 초반 들어서요 과거 기아차한테 계속 유리하게 딱딱 맞아떨어져만 갔던 주변 환경이 뭔가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다른 재벌들과의 경쟁 문제가 있었습니다. 가령 대우차는요 공격적으로 무이자 저이자 할부 판매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또 현대차는 기아의 텃밭이었던 중소형 상용차 생산을 재기하면서 지아의 시장을 야금야금 빼앗아 갔고요. 뒤늦게 자동차 사업에 뛰어댄 삼성의 경우에는 아예 기아차 지분을 대거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삼성이 기아를 적대적 인수 합병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돌며 삼성 지분이 거의 10% 가까이 올라왔습니다. 또한 삼성 외에도 현대도 기아차 지분을 또 매집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당시에는 금융사들 중에 재벌들 영향권에 있는 금융사가 되게 많았습니다. 아무 돈이나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아는 과거처럼 투자를 받는 게 아니라 사채를 조달해서 자금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종업원들 월급에서 지분을 사는 데 돈을 더 많이 공제하게 됩니다. 이전에 100만 원 월급 받을 때 만 원씩 공제해서 만 원 어치씩 지분을 매달 샀다면 이제 이걸 2만 원, 4만 원 이렇게 올리게 됩니다. 이에따라 종업원들이 가진 지분이 계속 더 빠르게 늘 게 됩니다. 하지만 기아차의  계획보다 판매도 부진했죠. 재개서열 18위까지 덩치는 키웠지만 자금 사정은 급속히 악화되던 기아그룹에게 운명의 1997년이 다가왔습니다. 97년 들어서 자본 시장이 급격하게 경색되고요. 

 


한보 진로 등이 쓰러지고 돈이 더 마르고 그러다가 97년 여름쯤 기아마저 어음을 못 막은 상황이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재개설 기아 그룹이 부도가 나게 됩니다. 이는 기아 사태라는 이름이 붙었고 기아 사태 이후에 이 자금 회수가 더 빨라졌어요. 그니까 돈이 정말 안 도는 거지 기업에 빌려줬던 돈들을 다 거둬들이는 거예요. 바로 이 시절에 기아차가 30% 할인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급전을 마련했던 거예요. 결국 정부가 1997년 10월 기아를 법정 관리한 이후에 전기업파 하했다고 발표한 뒤 기아 김선홍 회장도 사퇴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 있었죠. 그리고 불과 한 달도 안 돼서 정부 역시 못 버티고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습니다. 

이 과정을 두고 훗날 많은 이들이 기아 사태는 IMF 외환위기의 왜관이 되었다는 표현에서 정부 금융권 다른 재벌들 모두 기아를 챙길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아그룹이 무너진 이후에 기아차 회계를 다시 들여다보면 이미 1991년부터 사실 기아차는 적자였고 심지어 94년부터는 매년 평균 7000억 원씩 적자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게 되죠. 빈속연수가 높을수록 더 많이 합해서 모두 12% 넘는 회사 제분을 들고 있었던 기여 직원들은요, 감자로 인한 손해와 함께 실직 사태까지 겪게 됐니다. 그리고 외자 유치도 또 IMF 체제에서 기아를 공기업화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던 정부는요 기아차 공개 매각 절차에 들어갑니다. IMF 위기의 절정에서 한숨을 돌린 주요 재벌들이 기아차 인수전에 뛰어들었고요. 결국 기아차는 현대차가 인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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